2024.03 「사가 이용 안내: 빌려드립니다 서문」, 강수빈, + 「장한이와 강수빈의 대화록」, 챔버
(1)
매일의 상념을 수행적으로 기록하고 쌓아 올리는 장한이의 작업을 마음 선반, ‘사가(思架)’에 담아내면 어떤 모양일까? 장한이는 일상의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감정들을 분류하고 재해석한 뒤 이를 기호로서 시각화한다. 하여 어떤 작업은 다채로운 형상들이 화면 위를 반복해 부유하는 그림 일기장 같고, 여느 때에는 글과 그림이 한데 병치된 시화첩의 형식을 구사하며, 벽장문을 장치 삼아 그 너머의 내면을 관찰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업은 동일한 뿌리에서 출발하되 도서관에 분류되어 꽂힌 여러 서적들처럼 서로 다른 줄기로 표현된다. 본 전시는 챔버를 장한이의 책장으로 상정한 뒤, 도서 분류 기호에 따라 공간을 구성하듯 작업을 갈래짓고, 또 응집하여 작업의 현주소를 엿보도록 한다.
오늘날 활용되는 도서분류법은 갖가지의 서적과 문헌 속에서 원하는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게끔 도와준다. 대다수의 도서관이 철학, 종교 등의 인문학 도서부터 과학 분야, 그리고 예술 서적까지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가운데, 숫자 형식의 도서 분류 기호를 통해 이들 전반을 구분하여 간편히 시각화하는 것이다. 전시장 문턱 너머의 작업〈사가(思架)〉는 이러한 서지 항목의 안내 영역과도 같다. 하나의 화면을 네 개의 열로 구획한 뒤 지금껏 시도해 온 작업을 유형별 차곡차곡 배치한 내용으로, 기상 현상 및 기호 이미지, 책가도와 시화첩 연작을 소재 삼았다. 작품을 읽어나아가는 방식은 청구 기호 안내판과 동일하게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좌측에서 우측으로 방향 지어진다.
스물 네 개의 칸을 차지하는 내용들은 공간 곳곳에 개별 작업으로도 자리한다. 북카트 서랍과 벽장문 안을 비롯해 공간 끝에 놓인 진열대에 장한이가 되새긴 순간들이 놓여 있다. 유영하듯 흐르는 붓질의 반복과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내면을 촘촘히 포개어 보는 모습이다. 주로 택하는 작업 방식은 순지에 채색하는 것으로, 시작에 앞서 장한이는 늘 마음의 밑바닥에 고이는 생각을 산발적으로 써내려간다. 이후 습기를 덜어내듯 휘발과 여과의 과정을 반복하여 한차례 객관화된 형상을 도출하고, 기호의 배열과 소거를 거듭해 순지 위로 옮겨낸다. 이 같은 일련의 수행을 거치며 구체적인 서사는 탈락한 채 도식화된 형태만이 남게 된다.
한편 근래에는 기상 관련 기호, 즉 유동적이고 예측 불가한 날씨의 성질에 기인한 형상들이 도드라진다. 구름과 태양광, 대기의 파동이 고스란히 묘사된 화면에 더해 기상 위성의 시각이 관찰되기도 한다. 예로부터 날씨를 빗댄 속담이 일상에 친숙히 자리한 것을 떠올릴 때 일기 현상의 과학적 맥락을 사적 경험과 매듭짓는 방식은 제법 낯익다. 그러나 장한이는 비유를 통한 다독임에 그치지 않으며, 기상이 초래하는 사건들의 양가성에 주목하여 이를 갈등 해소와 생각 전환의 지표로 활용한다. 서로 다른 기단의 부딪힘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무한한 변수를 매일의 관계에서 엿보고, 상황을 다면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체화함으로써 옳고 그름의 기준이 모호한 세상 속 균형 잡기를 시도해 본다.
기상의 징후와 더불어 근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물감의 층위가 오롯이 드러나는 마감에 있다. 세밀히 더듬어 본 기저의 감각들을 한 겹 한 겹 시각화하는 과정에 몰두하는 것이다. 흔적과 자국의 표현을 위해 장한이는 밀가루 풀과 백토의 농도을 조절하여 투명도를 실험하고 붓질의 궤적 또한 한층 강조한다. 그 결과 지난한 마음은 가리어진 채 필선과 물번짐의 레이어가 맑게 생동하여, 기다란 제목만이 그 안을 헤아리도록 한다.
이처럼 장한이는 일상에서의 수집과 기록을 실천하며, 거대 담론의 반대편에서 주위에 혼재하는 사사로운 것들을 다시금 꺼내 올린다. 그리고 마주한 감정을 회화의 어법으로 전환하여 삶을 대하는 본인만의 방식을 바깥으로 내어 보인다. 대여가 가능한 프린트 에디션과 전시장 한편의 대화록 및 「사가 이용 안내 」는 그 작은 일환으로, 장한이가 관객에게 건네보는 마음이다. 작가의 심상이 빼곡히 담긴 드로잉에는 화면 위 형상을 도출해 내기까지 곱씹는 무수한 생각과 소란한 감정이 온전하게 자리한다. 서지 정보가 적힌 종이를 들고 책을 열람하듯, 수첩 속 기록과 맞닿은 감각을 찾아가며 그의 수행적 관점을 잠시 빌려보는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장한이의 책장을 여닫고 들추어 봄으로써 각자의 낡은 마음 덩어리 또한 잠시 끄집어 올리고, 흘려보낼 수 있기를 바라 본다.
매일의 상념을 수행적으로 기록하고 쌓아 올리는 장한이의 작업을 마음 선반, ‘사가(思架)’에 담아내면 어떤 모양일까? 장한이는 일상의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감정들을 분류하고 재해석한 뒤 이를 기호로서 시각화한다. 하여 어떤 작업은 다채로운 형상들이 화면 위를 반복해 부유하는 그림 일기장 같고, 여느 때에는 글과 그림이 한데 병치된 시화첩의 형식을 구사하며, 벽장문을 장치 삼아 그 너머의 내면을 관찰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업은 동일한 뿌리에서 출발하되 도서관에 분류되어 꽂힌 여러 서적들처럼 서로 다른 줄기로 표현된다. 본 전시는 챔버를 장한이의 책장으로 상정한 뒤, 도서 분류 기호에 따라 공간을 구성하듯 작업을 갈래짓고, 또 응집하여 작업의 현주소를 엿보도록 한다.
오늘날 활용되는 도서분류법은 갖가지의 서적과 문헌 속에서 원하는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게끔 도와준다. 대다수의 도서관이 철학, 종교 등의 인문학 도서부터 과학 분야, 그리고 예술 서적까지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가운데, 숫자 형식의 도서 분류 기호를 통해 이들 전반을 구분하여 간편히 시각화하는 것이다. 전시장 문턱 너머의 작업〈사가(思架)〉는 이러한 서지 항목의 안내 영역과도 같다. 하나의 화면을 네 개의 열로 구획한 뒤 지금껏 시도해 온 작업을 유형별 차곡차곡 배치한 내용으로, 기상 현상 및 기호 이미지, 책가도와 시화첩 연작을 소재 삼았다. 작품을 읽어나아가는 방식은 청구 기호 안내판과 동일하게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좌측에서 우측으로 방향 지어진다.
스물 네 개의 칸을 차지하는 내용들은 공간 곳곳에 개별 작업으로도 자리한다. 북카트 서랍과 벽장문 안을 비롯해 공간 끝에 놓인 진열대에 장한이가 되새긴 순간들이 놓여 있다. 유영하듯 흐르는 붓질의 반복과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내면을 촘촘히 포개어 보는 모습이다. 주로 택하는 작업 방식은 순지에 채색하는 것으로, 시작에 앞서 장한이는 늘 마음의 밑바닥에 고이는 생각을 산발적으로 써내려간다. 이후 습기를 덜어내듯 휘발과 여과의 과정을 반복하여 한차례 객관화된 형상을 도출하고, 기호의 배열과 소거를 거듭해 순지 위로 옮겨낸다. 이 같은 일련의 수행을 거치며 구체적인 서사는 탈락한 채 도식화된 형태만이 남게 된다.
한편 근래에는 기상 관련 기호, 즉 유동적이고 예측 불가한 날씨의 성질에 기인한 형상들이 도드라진다. 구름과 태양광, 대기의 파동이 고스란히 묘사된 화면에 더해 기상 위성의 시각이 관찰되기도 한다. 예로부터 날씨를 빗댄 속담이 일상에 친숙히 자리한 것을 떠올릴 때 일기 현상의 과학적 맥락을 사적 경험과 매듭짓는 방식은 제법 낯익다. 그러나 장한이는 비유를 통한 다독임에 그치지 않으며, 기상이 초래하는 사건들의 양가성에 주목하여 이를 갈등 해소와 생각 전환의 지표로 활용한다. 서로 다른 기단의 부딪힘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무한한 변수를 매일의 관계에서 엿보고, 상황을 다면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체화함으로써 옳고 그름의 기준이 모호한 세상 속 균형 잡기를 시도해 본다.
기상의 징후와 더불어 근작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물감의 층위가 오롯이 드러나는 마감에 있다. 세밀히 더듬어 본 기저의 감각들을 한 겹 한 겹 시각화하는 과정에 몰두하는 것이다. 흔적과 자국의 표현을 위해 장한이는 밀가루 풀과 백토의 농도을 조절하여 투명도를 실험하고 붓질의 궤적 또한 한층 강조한다. 그 결과 지난한 마음은 가리어진 채 필선과 물번짐의 레이어가 맑게 생동하여, 기다란 제목만이 그 안을 헤아리도록 한다.
이처럼 장한이는 일상에서의 수집과 기록을 실천하며, 거대 담론의 반대편에서 주위에 혼재하는 사사로운 것들을 다시금 꺼내 올린다. 그리고 마주한 감정을 회화의 어법으로 전환하여 삶을 대하는 본인만의 방식을 바깥으로 내어 보인다. 대여가 가능한 프린트 에디션과 전시장 한편의 대화록 및 「사가 이용 안내 」는 그 작은 일환으로, 장한이가 관객에게 건네보는 마음이다. 작가의 심상이 빼곡히 담긴 드로잉에는 화면 위 형상을 도출해 내기까지 곱씹는 무수한 생각과 소란한 감정이 온전하게 자리한다. 서지 정보가 적힌 종이를 들고 책을 열람하듯, 수첩 속 기록과 맞닿은 감각을 찾아가며 그의 수행적 관점을 잠시 빌려보는 여정이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장한이의 책장을 여닫고 들추어 봄으로써 각자의 낡은 마음 덩어리 또한 잠시 끄집어 올리고, 흘려보낼 수 있기를 바라 본다.
글 강수빈
※ 본 대화록은 강수빈과 장한이가 주고받은 메일을 편집한 내용입니다.
2023.11.8.(수)
한이씨, 전시 함께 할 수 있다는 소식 들은 뒤 처음 메일을 드리네요. 겨울동안 많은 것들 함께 생각하고, 눈에 담고, 대화 나누며 전시 꾸려가 보아요. 기획 준비하며 언급했던 날씨 도상에 관한 부분도 빨리 이야기 나누어 보고 싶네요. 한이씨의 심상을 날씨와 엮어서 표현했을 때, 그게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요. 또 요즘 읽고 있는 책이나 한이씨만의 루틴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같이 전시 준비하는 기간 동안 서로 많이 소통하고 이해하는 시간이기를 바라요.
수빈 보냄
2023.11.15.(수)
저는 요즘 『구름을 사랑하는 기술』이라는 책을 읽고 있어요. 구름으로 하늘을 읽고 날씨를 읽는 방법에 대한 책인데, 책 안의 내용은 구름을 정말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기술한 것이에요. 재미있더라고요. 날씨라는 게 100% 확신할 수 없는 것인데, 그간의 데이터나 과학기술의 현상 분석을 통해 사실에 가까운 예측과 대처를 한다는 것이요. 익숙하게만 받아들여온 일기예보가 이렇게 우리 삶에 가까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경험적 분석과 대응이 있었다는 거잖아요.마음도 그런 것 같아요. 당황스러움, 분노, 억울함, 부끄러움, 기쁨, 행복 같은 것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오고, 예측도 안되고, 내가 어떤 생각을 하냐에 따라 내 감정의 결과도 달라져요. 심지어 각기 다른 상황에서 찾아오기도 하고요.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노력해도 쉽지 않은 게 마음의 평정심을 찾는 것 같아요. 불안정할수록 안정감을 느끼려 노력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더욱 이 부분을 루틴화할 방법을 찾는 것 같아요. 이 감정이 뭔지,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땐 어떻게 반응할지….생각을 처리하는 나만의 장치가 고안되면, 저를 요동치게 하는 감정이 들어올 때 매번 궁리를 해야 할 필요 없이 제 방법을 쫓게 되는 거죠.
한이 보냄
출처: 아라키 켄타로, 『구름을 사랑하는 기술』, 김정환 옮김(서울: 쌤앤파커스, 2019), 72
2023.12.11.(월)
아래 표는 구름을 유형에 따라 10가지로 나눈 내용인데요. 구름의 성질을 읽고, 각 특징에 맞춰서 사람의 주된 열 가지 감정을 연결해 봤어요. 이렇게 구름을 구분할 때 그 안에서 부변종도 있고, 하늘에 여러 유형이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어서 사실상 열 가지로 완전히 나뉘지는 않는다고 해요. 감정도 이렇게 딱 열 개로 구분할 수는 없지만, 큰 지표를 가지고 있으면 지금 내 감정의 이유를 파악하고 행동하기 좋을 것 같았어요.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과 관점이 있는데 내가 이런 감정이 왜 들었는지도 모른 채 단순히 짜증 난다고 표현하며 여러 감정을 뭉뚱그려 버리는 것 보다는, 그 감정의 이유를 잘 알고 나를 잘 다스리는게 중요다고 생각해요.한이 보냄
2023.12.30.(토)
아침부터 눈이 휘몰아치는 날입니다. 동시에 어느새 연말이네요! 메마른 기분으로 글을 적다가도 밖에 펑펑 나리는 눈을 보니 마음이 촉촉해지네요.한이씨는 요즘 어떤 상황에 있고, 또 어떤 감각을 떠올리려나요? 지난번 만남에서는 텍스처 구현 방식에 관한 고민을 가장 많이 나누었는데, 혹은 새롭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드로잉으로 마구 마구 담는 중일지…편히 작업 근황 말씀 주시면 새해 만나기 전에 새겨두고 갈게요.수빈 보냄
2023.1.3.(수)
수빈씨, 해피 뉴 이어! 어느새 회신이 한 해를 건너버렸네요.저는 연말과 연초는 항상 0(제로)에 가까운 상태 혹은 살짝 마이너스의 상태인 것 같아요. 날이 따뜻해지면 그제야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 같아서요. 뭐랄까, 진짜 시작은 봄을 맞이하는 3월이고 겨울은 그전에 새로운 해를 맞이하며 적응하는 수습 기간처럼 느껴져요. 새로운 계획을 위한 정보 수집 단계 같은 느낌이요. 그래서 딱히 한 해의 성과 같은 걸 측정하려 하지도 않고요.
저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사람같아요. 결론을 또 하나의 과정으로 여기면서 계속해서 변화를 꾀하고, 상황에 맞게 유연히 탈바꿈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리고 이런 제 지향점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어떤 모습일까 생각했어요. 과정 중심의 드로잉북과 리서치 모음이 전시장에 매번 같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그랬을 때 ‘흔적’과 ‘자국’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어요. 감정을 이미지화할 때 제게 떠오른 형상들이 스톱모션 영상처럼 동동, 혹은 흔들흔들 미세하게 움직이더라고요. 아주 적은 프레임 컷의 영상처럼요. 그게 마치 자국처럼 느껴지는데, 이러한 흔적과 자국은 반투명하게 스며들며 쌓여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요즘 밑칠과 채색을 할 때 밀가루 풀이나 백토의 농도를 조절해가면서 실험해 보고 있어요. 밀풀을 많이 넣으면 안료가 반투명해지고, 백토의 비중을 올리면 불투명해져요. 둘 다 선명하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시각적으로 다른 인상을 줘요.
날씨에서 오는 현상이 한 가지의 프레임이나 사진 컷으로 보이기는 어렵잖아요. 하나의 현상에는 시작과 끝의 과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제가 담으려는 관계에 대한 인상도 비슷한 것 같아요. 정확한 듯 모호하게, 어떤 형태가 형성되는 듯 또렷하지 않게, 어딘가로 흘러가는 듯 그곳에 머무는 것처럼…. 저는 이런 복합적인 상태나 중의적인 상태에 끌리는 것 같아요.
한이 보냄
출처: 아라키 켄타로, 『구름을 사랑하는 기술』, 김정환 옮김(서울: 쌤앤파커스, 2019), 232
2024.2.11.(일)
책을 읽다가 발견한 것인데, 사진에 보이는 이런 현상은 켈빈-헬름홀츠 불안정이 만들어내는 ‘구름 플룩투스’라고 해요. 하늘에 파도가 치는 것 같죠? 밀도가 다른 층이 위아래로 접한 상황에서 유속 차이가 있을 때, 구름이 그 속도 차이에 따라 흘러간 모습이에요. 대기의 불안정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 아름답지 않나요? 저는 ‘불안정’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상태, 혹은 불안정하거나 이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보았는데, 생각보다 기상 현상에서 불안정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더라고요. 그리고 그 현상이 꼭 우리 삶에 위기만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요. 그저 어떤 규칙적이지 않은 움직임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을 불균일, 혹은 불안정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더라고요. 재미있었어요. 날씨는 이런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대기의 불안정이 아름다운 현상으로 가시화되기도 하고, 인재를 불러일으키더라도 꼭 부정적으로 볼 것만이 아니라 예비와 대책의 방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요. 또는 흔치 않은 광경을 붙잡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고, 날씨의 어떠한 현상을 계기로 일상의 터닝포인트나 생각의 변곡점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날씨는 또 제가 닮고 싶은 유연한 자세 같기도 해요. 고기압과 저기압은 기준점이 없대요. 상대적으로 주변보다 높으면 고기압, 낮으면 저기압이라고 하는데, 굉장히 기본적인 기상 과학 상식이겠지만, 새삼 ‘그래…. 맞아!’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냥 옳다구나! 싶었달까요. 평소 저는 불안함을 많이 느끼는 성격이에요. 멀리서 보면 순탄하게만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작디 작은 것들을 붙잡아 두는 성격이기도 하고. 또 고민 지점이 해결이 되더라도 그로써 완료되는 게 아니라, 그 고민에 쏟던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 새로운 불안을 찾기 시작해요. 근데 날씨를 공부하며 마음으로 와닿은 게, 불안함은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불안정한 날씨로부터 희귀한 현상이나 아름다운 광경이 탄생하는 것처럼요.
한이 보냄
2024.2.13.(화)
지난번 밀가루 풀과 백토의 농도 이야기가 문득 떠오르는데요. 농도가 짙어지면 마치 오늘의 미세먼지 가득한 날씨 같은 느낌이려나… 하는 우스운 생각과 함께. 흔적과 자국을 겹겹이 쌓아 올리고, 그 모든 과정을 좀 더 정확히 드러내려는 것은 아마 한이씨의 마음을 좀 더 세밀히 표현하려는 시도이겠죠? 마음이 단순히 하나의 완결된 평평한 덩어리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복잡다단한 요소를 담고있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요.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독서나 작업을 통해 날씨에 관한 관심을 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 일까요? 3년 전 《제3의 과제전》을 준비하며 날씨 모티프를 얼핏 봤었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드러났던 것 같긴 하지만, 지금처럼 더 눈여겨 탐구해 본다는 인상은 못 받기도 했고요. 날씨가 한이씨 안에서 주요 소재로 대두된 시기가 궁금해요.
수빈 보냄
에어로졸 아이디어 스케치
2024.2.16.(금)
저는 작업 과정을 정확하게 루틴화하는 편이잖아요? 이런 식으로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날씨였던 것 같아요. 누구나 감성이 차오르고 센치해지는 날이 있겠지만 저는 그게 유독 변화무쌍한 날씨, 자연 앞에 설 때였어요. 저라는 사람이 굉장히 작게 느껴지고, 시야에 담기는 날씨가 제 앞에 드리우며 질문을 하는 느낌…. 그것도 엄청 초연한 질문으로요. ‘어떻게 살 것인가.’ ‘이대로 좋은가?’와 같은.소소한 예이지만, 한번은 친구들과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이었는데 소낙비가 오더라고요. 버스 창가에 비가 맺혀서 흐르는 꼴을 보니 ‘이제 곧 독립을 해야할 때가 올텐데, 내가 혼자서도 잘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불안이 증폭되었어요. 아마도 그때쯤부터 불쑥 찾아오는 막연한 질문들이나 날씨 변화에 관련된 순간의 감상을 기록하기 시작했고요. 한 번쯤 가만히 짚어보아야 할 현실의 지점들을 날씨가 상기해주는 것 같았어요. 갑작스레 제 머릿속을 휘저으면서요. 이전부터 날씨나 자연의 감상에서 비롯된 형태가 나타났던 건 그런 이유에서인 것 같아요. 내 안에서,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순간을 날씨에 빗대어 풀어내다보면 이 모든 어려움이마치 자연의 섭리, 혹은 누구나 겪는 불규칙적인 변수처럼 다가와 마음이 한결 편해지더라고요. 그러다가 재작년《세품생활》전시를 준비하면서 시의도를 공부하게 됐는데요. 처음에는 시의도의 구성과 시품에 매료되어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 파면 팔 수록 그 안에 사계산수인물화라는 장르가 곁들어져 있는 거예요. 여기서도 시론이라는 정형화되지 않은, 시각화하기 모호한 주제를 계절의 정서나 날씨 변화, 자연의 순리로 은유해요. 그때 생각했어요. 한번 따로 공부해 보면 재밌겠다. 이러한 비유와 해소의 과정들은 생각보다 곳곳에 있고, 나만 이렇게 사사로운 것에 영향받으며 살아가는 게 아니구나.
이 부분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있다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있어요. 초반에는 특정 현상보다는 기초적으로 구름을 형성하는 것들에 대해 공부했는데요. 그중에 에어로졸이라는 요소를 알게 됐어요. 에어로졸은 하나 하나로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만, 그 수에 따라 구름의 형성 발달에 변화를 주는 무시무시한 녀석들이에요. 홀로는 아무런 변화를 줄 수 없지만 그 수가 많아질 때 주변 미립자가 액체인지, 고체인지에 따라 비구름이 될지, 눈구름이 될지 나뉘어요. 이 에어로졸이라는 게, 한 사람의 상태를 어떤 기분으로 변화시킬지 좌지우지하는 무수한 상황들 같더라고요. 미미한 존재이지만 구름의 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요. 그 모양을 상상하며 드로잉을 시도해 봤는데, 작업 곳곳에 넣어볼 생각이에요.
한이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