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i Jang Artist Statement


나는 기술적으로 고도의 발전을 거듭하는 현대사회에서 소외되는 개인의 삶과 결핍된 정서를 시각 언어로 탐구하고, 그것들을 '수기'의 형식으로 가시화해 소멸되는 인간성을 복원하고자 한다. 그 때문에 나의 작업은 아주 미시적이고도 개인적인 일상의 경험과 그로부터 비롯된 감정의 파고에서 시작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들, 조금씩 달라지는 인식과 감각들을 감지해 손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기록을 통해, 감각적 경험을 회화라는 시각 언어로써 전달하고자 한다.

‘기록’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자 결과다. 기록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오랜 기간 축적된 기록은 역사적 자료가 되기도 하고 보편적 상식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중 특히 달력, 24절기, 기상학 등과 같이 사회적 약속이 된 기록들에 주목한다. 어떤 현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반복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일정한 법칙과 질서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이미지가 될 때 우리는 그것을 기호 또는 도상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러한 기록의 원리를 참조해 일상에서 경험하는 미세하고도 점진적인 변화들을 그려낸다.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일들과 기분에 따라, 하루하루는 다른 감정과 인상으로 기억된다. 이런 매일의 기억을 기록하다보면 이미지는 점차 추상화되고, 반복적인 패턴으로 나타난다. 나에게 패턴은 시각언어로서 감정을 기록하는 수단, 즉 나만의 기호 또는 도상이 된 것이다. 이미지에 감정을 담기 위해 나는 회화 매체를 적극적으로 실험한다. 물감의 색과 질감, 붓질의 속도뿐만 아니라 종이의 흡습성을 조절하기 위해 직접 배합한 아교포수를 활용하기도 한다. 종이에 물감이 스미는 정도에 따라 붓질의 흔적은 투명하게 혹은 불투명하게 기록되고, 그것은 곧 ‘기록하는 나’의 감각이 시각화된 궤적이다.

전통 회화는 또 다른 기록으로서 참조의 대상이 된다. 화첩이나 병풍 같은 여러 폭의 작품형식은 같은 주제로 이어지는 연작을 구상하게끔 했고, 시(詩)의 품격을 논한 당나라 사공도의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을 그림으로 그린 정선의 시의도 <사공도시품첩>은 현대인으로서의 삶의 태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이십사세품도’ 연작의 모태가 되었다. 나는 ‘책가도’의 형식을 따라 이미지를 구성하거나, 서가식, 나열식, 벽장식 등 책가도의 종류별로 서가에 책이 쌓인 모습을 참조해 그림을 서고 형태로 배치하기도 했다. 내 작품을 일종의 기록물로 다루는 시도는 전시장에 북카트를 배치하고 마치 도서관의 책 대여 시스템처럼 그림을 빌려갈 수 있도록 연출하거나, 실제 벽걸이형 책장에 그림을 꽂아두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나는 전시장을 원룸처럼 꾸미고 빨래건조대에 그림을 수건처럼 널어놓기도 했는데, 이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기록으로서 내 작품이 읽히길 의도한 것이었다. 

감정은 휘발되기 쉽다. 하지만 감정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자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AI와 자동화 기술이 인간의 손을 대체하는 시대 속에서, 감정을 손으로 기록하는 행위와 그 기록물로서의 회화가 순환하며 흘러가는 삶 속에서 놓치기 쉬운 감각과 감정들을 다시금 바라보게 하는 작은 창이 되길 바란다.



글. 장한이